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(문단 편집) ==== 음모론 ==== 진주만 공습은 미국 정계에도 상당한 후폭풍을 남겼는데, 미국사 최초로 3선에 성공한 [[프랭클린 D. 루스벨트]]가 진주만 공습 이후 세계대전을 정리하겠다는 명분 하에 4선까지 도전하려 하자 정적들 사이에선 미국 정부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,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[[음모론]]이 생겨났다. 대표적으로 고립주의자이자 반 루스벨트 성향의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존 T. 플린(John T. Flynn)이었다. 그는 1944년 10월 17일 라는 46쪽짜리 소책자를 발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가 유럽 전쟁에 돌입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. 이 주장이 한때 미국 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,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듀이의 캠프에서도 이러한 음모설을 들고 나올 것을 고려하기는 했을 정도였다. 하지만 미군이 일본군을 감청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곧, 일본의 암호체계를 전쟁 전부터 해독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에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이 직접 제동을 걸었다. 듀이 또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익을 해칠 수 없다며 입을 다물기로 했다. 상식적으로 그가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진주만 음모설을 무리하게 논쟁화했다면 국민의 공감을 얻기는 커녕 전쟁 사기를 떨어뜨림은 물론이고 이적행위로 정치 생명이 끝났을 수 있다. 이걸 훗날 한도 가즈토시 같은 일본 학자들이 받아서 비슷하게 주장하기도 했으며, [[데즈카 오사무]]의 [[아돌프에게 고한다]]에서도 정설인 양 등장했다 신나게 까였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모론을 놓지 못하는 집착인들도 있는데, 혹자는 당시 뉴딜 정책의 약빨이 떨어진 루스벨트 정부가 생산과잉 및 그에 따른 고용부족을 한방에 해결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, 이건 팩트부터 틀린 게 루즈벨트 1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뉴딜 정책이 집권 2기 초 2년간 이전보다 약빨이 떨어진 건 사실이긴 했지만[* 다만 이것 역시 대공황 시절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고, 무엇보다 애초에 이때 뉴딜 정책은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에 오히려 예산이 감축되는 등 후퇴했던 상태라 오늘날 경제학자들 간에도 갑론을박이 다분한 주제이다. 폴 크루그먼 교수 같은 경우 오히려 이때 경제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로 뉴딜 정책을 원래대로 시행하지 못하면서 일시적 불황이 왔다고 분석할 정도.] 하지만 1939년 들어 경기는 다시 호조세로 돌아섰고 1940년 나치의 [[프랑스 침공]] 등으로 서유럽이 대대적인 전쟁 상황에 들어가면서 미국은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. 그렇기 때문에 유럽이 작살나든 말든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고립주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. 선거 역시 대선, 상하원 가릴 것 없이 루스벨트 정부가 큰 격차로 연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 와중에 FDR 정권이 굳이 전쟁 참가라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. 일각에선 진주만의 급소였던 지상의 [[원유(연료)|원유]] 공급 시설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고, 많은 수의 전함들과 유조선 역시 살아남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유로 자꾸 이걸 정치적인 음모론으로 엮으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후술된 음모론에 대한 반론 항목 참조. [[이원복]] 작가의 [[먼나라 이웃나라]] 미국 역사 편에 따르면 1941년 초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Joseph_Grew|조셉 그루]]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"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쏠린" 미국 정부는 "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"고 한다.[* 한편 조셉 그루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과의 국교를 스스로 단절할 때까지 주일대사로 근무했으며 개전 즉시 억류되었다가([[둘리틀 특공대]]의 공습 당시에도 아직 억류되어 있었다) 미일간 합의에 의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(오늘날의 [[모잠비크]])에서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, 대미 특사 쿠루스 사부로 등과 교환되어 반 년간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.]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장소나 방법, 피해 규모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. 실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을 좋게 보지 않고 중국에서의 철수를 압박하며 석유 제한 조치 등 각종 딴지를 걸고 있었기에 미일 관계가 험악한 것은 사실이었다. 하지만 협상으로 풀려는 와중에 선빵을 때린 건 결국 일본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